〈랑야방: 권력의 기록, Nirvana in Fire〉의 극중 인물인 소경예의 상투관 제작 의뢰를 받았습니다. 비녀의 길이를 늘인 미니어쳐 목걸이 하나, 목측 예상 실물 사이즈 하나를 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극중 소품과 같은 형태를 만들고 싶다는 정도의 문의였기 때문에, 실 사이즈 제작은 대공(작은 것을 정교하게 만드는 세공과 대응되는 큰 작업)이라 공임이 많이 든다는 설명을 드렸고 목걸이 제작만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에 5cm 정도의 비녀 길이로 약간 큰 미니어쳐 제작을 논의하던 중, 공방으로서도 실물 사이즈의 작업이 욕심 나서 작업 방식을 변경하여 제작해 보고 싶다고 제안을 드린 결과물입니다.
처음에는 상투관 뒤쪽의 이미지를 찾지 못해서 고객님과 머리를 맞대고 상상하여 工자로 리벳을 박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제작 중 다시 드라마를 시청하시던 고객님께서 뒤를 돌고 있는 인물의 두상 이미지를 찾아 주셔서 거의 완성되었던 모양을 엎고 처음부터 새로 작업하였습니다. 공방에서는 뒤쪽의 곡면 두 개를 땜하여 붙였지만, 실제로는 떨어진 금속 두 개를 검은 끈으로 묶어서 쓰는 것 같았습니다. 상투관을 지나는 비녀도 정확한 이미지를 찾지 못해 다양한 장면을 캡쳐해 가며 최대한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극중 비녀의 재질은 실제로는 비취일 거라 예상합니다. 백색과 상아색의 얇은 무명천으로 상투건을 만들어 주신 한복 바늘씨와 뒤쪽을 여밀 검은 실을 끊어 주신 공방 옆집 흉배 자수씨 감사합니다.
소경예는 복잡한 출생 비화를 가졌지만, 현실적인 성숙함과 배려심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며 극의 품위를 끌어올리는 인물입니다. 어느 가문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진 이름조차 황자의 이름인데, 그 이름의 격과 살아온 환경을 감안한다면 이 상투관은 그의 소탈함을 상징하는 듯 보였답니다. 다른 복식은 받는대로 입어도 이것만은 그가 스스로 고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에 쓸만한 하얀 판재 금속은 화폐로 흔했을 은이나 장석 따위를 만드는 백동이었을텐데 소재, 형태, 상투관을 바꿔 쓰는 주기 등 어떤 면을 보아도 다른 인물들의 화려함과는 달랐거든요. 극을 보면서도 관리의 품계에 따른 관모 장식의 색깔이나 비녀와 동곳 소재의 귀천, 혹은 왜 오른손잡이인 매장소가 왼손잡이용 옥상투관을 사용하는지 등 소품을 눈여겨 보고 대사로 드러나지 않는 관계와 성품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