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 ⟨금속공예와 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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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 ⟨금속공예와 나⟩ 에세이

과제 | ⟨금속공예와 나⟩ 에세이

1. 별 의미없는 물건과 나

우리는 아주 사소한 물건으로도 누군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짐작은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단지 나와 같이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머지도 비슷할 것이라 여겨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뇌의 자율주행은 자주 틀리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이라 여겼던 것에 호된 가르침을 얻곤 한다. 그 자동 생각이 얼마나 사소한 것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는지, 최근에 휴지심을 통해 알았다. 어느 수업 준비를 위해 404 세미나실 책상을 정리하던 중 한 학생이 휴지심을 치웠다. 맞은 편에 있던 학생이 말했다. “아이쿠 저런 B 교수님이 보셨으면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나는 그 짧은 대화를 통해 토일렛 페이퍼는 배쓰룸에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로 작업실에서의 나와 비슷한, 유난스럽게 깔끔하다는 타박을 들으면서도 원어의 어감과 그것이 생겨난 문화 관행에 따르는 보수적인 성격을 상상했다.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약간의 친근감이 생겼다. 더불어 더 중요한 어떤 차이에 관한 정보도 얻었다. 책상 위 토일렛 페이퍼를 참을 수 없는 B 교수님과 달리 나는 공방 작업실에 토일렛 페이퍼가 뒹구는 것을 참아낸 끝에 익숙해졌고, 심지어 자발적으로 작업대에 토일렛 페이퍼를 두고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이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모습으로 변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토일렛 페이퍼 한 쪽이 세공책상에서 칠보 작업을 할 때 물기를 빨아들이기 적합한 용량의 흡습성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학교에서 보이는 토일렛 페이퍼가 화장실에 머물다 왔을 가능성이 커서 출처에 관한 비위생적인 상상을 하게 하는 데 반해 (물론 과학자들과 유머사이트에 따르면 변기는 손이나 휴대폰보다 세균수가 적고,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물건이다) 공방에서 쓰는 토일렛 페이퍼는 공구 옆 창고처럼 쓰는 공간에서 옮겨졌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내가 작업실 공간의 주인이 아니며 서열 또한 낮다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가장 존중받아 마땅하고, 실제로도 가장 신뢰받는 이는 일주일에 7일을 아침 9시 반에 나와 저녁 8시에 퇴근하는 (광적으로) 성실한 세공기능장이다. 엄청난 규모의 다종다양한 공구를 정리하고 사용하는 그를 보며, 위생과 청결을 오직 실용에 복무하는 수준으로만 취하는 삶의 종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존중하는 마음은 받아들이는 태도가 되었다.

그 수업의 교수님도, 다른 학생들도 토일렛 페이퍼가 뽑아쓰는 미용티슈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양인의 삶에 대한 기준이 낮거나 개방성이 더 높을 누군가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싫은 기색을 숨긴다. B 교수님은 그 자리에 부재하였으나, 휴지심을 통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도 되는 사람’임을 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뇌의 자율주행은 아마 부정확할 것이다. 무엇에든 솔직해도 괜찮은 권력자와 친근감으로 진솔한 의견을 제시하는 어르신은 멀리서 봐서는 잘 구분할 수 없으며, 사람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입체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물건과 나

한 심리학자가 묻는다. 한글은 누가 만들었냐고. 세종대왕이다. 그에게 다음 질문이 있다고 한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냐고. 나는 대답한다. 어쩌면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지식의 습득을 축하하며 누군가 선물을 주거나 맛있는 것을 사주는 유난스러운 보상을 했다면 내용의 메타정보가 각인되었을지도 모르다고.

결혼반지를 보면서 기혼자들은 사랑을 느끼는가, 아니면 사랑하기로 기약한 그 날을 기억하는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끝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성차별적 임금을 받는 사회에서 약혼반지로 여성에게 증여되곤 하는 다이아몬드는 2-4달 치 남성 월급 정도인 것이 통상이라 안내하며 1캐럿 다이아몬드를 천만원 정도에 소개하는데 (공교롭게도 실제 시장 가격도 그 정도로 형성되어 있다) 천만원 정도에 영원한 사랑을 얻는다면 그것은 실로 저렴하다. 우리는 물건에, 기념품에 메타정보를 심는 것을 정보 자체라고 착각하기로 약속하고, 크고도(천만원은 큰 돈이다) 적은(천만원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비매품을 사기에는 적은 돈이다) 비용을 혼쾌히 지불한다.

아마 사랑하기로 기약한 그 날을 저장하는 드라이브 주소와 같은 메타정보 노릇을 하기 때문에 어제는 기혼자였으나 오늘은 이혼하게 된 누군가도 그 존재를 참아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반짝이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슬픔과 역겨움을 참아내고 사랑보다 더 큰 자본주의에 순응한다. 성실한 사회인이 일처리를 하듯 보석과 귀금속을 환금하여 출처를 세탁하고 그 돈을 유용하게 써버린다.

기념품, 사치품이 정보 그 자체이면 어떻게 되는가. ‘절대반지’를 모르도르 산에 던져버리러 가는 이야기가 펼쳐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금속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문학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서사시를 일축하는 짓궂은 방식이다. 우리가 환금성 높은 재료로 기념품을 만드는 이유는 영원히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수월하게 교환해 ‘버리기’ 위해서이다. 이 아이러니를 얼마나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세공사, 금속공예가, 순수예술가가 나눠지는지도 모른다.

3. 작업과 산업이 언어의 지배하에 있음을 인정하는 나

나는 투기 자본으로 부동산을 통해 예술적인 수익을 창출한다는 의욕 넘치는 예술가들에게 임차인의 입장에서 시달려본 적이 있다. 예술을 앞세운 그들의 기만적인 행보에 언어를 벼려 맞서야 했기에 당시에는 잔인하고 자극적인 단어와 표현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러한 칼날같은 표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자에게도 영향을 주기에 지금 보면 과격하고 철이 없다. 남을 해친 말은 나에게도 쓰리고 부끄럽다. 그 🔗인터뷰 일부를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Q 20. 사소하게라도 남다르다 생각하시는 영업방침이나 제품 특징 등이 전혀 없으 신지요.

A 고객의 주문을 잘 해석하기 위해 사훈처럼 내세우는 단어 세 개가 있긴 합니다. 사랑, 보석, 복수. 사랑은 발산하고 이동하는 선, 보석은 수렴하여 고정된 점, 복수 는 회귀하여 시작점에서 닫힌 도형이라고 설명합니다. 앙갚음이라기 보다는 응보 개념인데, 복수라는 단어가 더 인기 있어서 그만… 무엇이 왜 필요한지 주문자의 마음을 함께 그려보는 도구 삼은 단어들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 한 쪽이 크게 허물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를 돌이 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월인공방을 찾아왔습니다. 불행 때문이든 행복 때문이든 날뛰는 사랑의 끄트머리를 잡아 어떻게든 지혈해야 했습니다. 선 끝 을 흐리는 용서나 망각이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마음 속의 뱀을 매듭짓 기 위해 부적이나 시술, 학벌 등 강력한 마침표를 찾는 것이 아닌지요.

인간의 깜냥을 인정하고 마음을 고정할 상징을 찾아 자기 자신을 잘 다루기로 하는 시도를 그냥 다 복수라고 불렀습니다. 사치품을 팔았지만 판매자도 구매자도 대개는 생필품으로 여겼습니다. 보석과 귀금속은 매우 비싸지만, 제가 명품업자는 아니기에 지옥같은 몇 년의 시간보다는 저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개인 주문은 체력이 달리고 인건비 책정도 곤란해서 계속 할 수 있을지 자신 없습니다.

체력은 없으나 망상을 할 기력이 남아나던 시기에는 마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표현에 빠진다. 그것은 발산이자 함몰이다. 되먹임이기도 하고 되새김이기도 한 몸부림과 개똥철학이 부끄럽고 겸연쩍은 글이지만, 어려서나 쓸 수 있었던 분노의 글줄 속에 미래에 숙제를 할 나를 위해 준비한 듯한 화두가 숨어 있었다.

‘luxury’를 영한사전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호화로움, 사치
2. 사치(품)
3. 드문 호사(자주 누릴 수 없는 기쁨·혜택)

‘명품’을 한영사전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뛰어난 작품) masterpiece, masterwork
2. (이름난 상품) brand-name product, designer label

존경받기 위해 사치가 필요했다가 그 사치 때문에 몰락한 이들에게 봉사한 산업, 인종차별에 기반한 백인 장인의 이미지를 내세워 가격을 책정하면서도 베트남의 저력을 도입했다며 정치적으로 입바른 듯 인종 간 위계를 확인하는 영리한 산업. 고집스럽게 지켜온 가문의 정신은 공임 앞에 유연하게 국경을 넘나들지만 물가상승은 알뜰하게 반영한다. 이다지도 트렌디한 luxury 산업은 왜 한국에서 ‘사치품’이 아니라 ‘명품’일까.

사치품은 자기과시를 위한 속물이 구매할 것 같지만, 명품은 자기만족을 위한 심미안이 선택할 것 같다. 과시, 차별, 인정, 소유에 복무하는 장치가 잘 작동하도록 한자어를 영리하게 번역했으리라는 의심을 해볼만 하다. 이는 유럽어를 한자어로 번역하거나, 다양한 번역어 중 대표 명사를 선택하는 권위자가 그 수입과 유통을 통해 수익과 지위를 얻었음을 상상하게 한다.

나는 공예 기술과 전승, 작가정신 등이 남들과 차별화되길 바라는 누군가의 지위에 봉사하는 luxury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품에 대한 찬사는 피지배자의 삶의 투쟁이 아니라, 안전지대에 있는 지배자의 호혜적인 관조는 아니었을지. 실용을 넘어선 장식과 필요 이상의 기능을 갖춘 공예품을 만들고 사용하는 특별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그것을 수식하는 단어를 선별할 권위자의 선택에 따른다.

영국 교외 지역 젠트리에 사는 젠틀맨은 교양있는 처신을 고민하며 사치품을 구매하는 것을 망설였을 것이다. 젠틀맨과 양반의 번역어인 신사는 사치품이 아닌 명품으로 번역된 luxury를 구매하는 것에 큰 갈등을 겪지 않는다. 이것이 사치품과 명품을 구분하여 사용한 젠트리피케이션 피해자가 작가이자 업자로 언어권력을 상상하는 방식이다. 시각과 촉각을 통한 감각적인 수용이 아니라 작업을 언어로 번역해 논문이라는 결과물을 내 놓아야만 하는 곳에 가서 세공사와 금속공예가가 어떻게 다른지, 단지 말장난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자고 결심하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4. 근력 노동이 작업의 진정성을 담보하는지 회의하는 나

이는 과거 제품의 제작방식에 대해 받은 질문에 대해 공지사항으로 답변했던 바를 옮겨 내용을 갈음한다. 어느 정도까지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작가란에 사인해도 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월인공방입니다.

한 분 한 분 답글을 달아드리지 못하고 있으나 모든 댓글을 읽고 있습니다. 추후 반영을 고려해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귀한 의견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문에 넣고 싶었지만 분량 때문에 생략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은 수량의 검 제작이 어떻게 가능한가?’ 에 대한 답변입니다.

검도 다른 실용품들이 그러하듯 다양한 소재를 조합하여 제작합니다. 어피나 가죽, 목재 등 부드러운 소재를 다루는 것부터, 철을 담금질 하여 강으로 만들고 날을 벼리는 등 다양한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두 시간 만에 이 다양한 소재 기술을 다 동원해 도검 하나를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인검이나 사인검도 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검신의 형태를 만들는 과정을 그 시간에 안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물 사이즈의 도검을 철로 작업했다면 두 명 이상이 붙어 하나나 두 개를 망치질 하는 것도 버거울 시간입니다. 공방에서는 그 제작방식 중 중요하다 판단한 일부 요소를 반영하여 ‘검 형상’의 은 세공품으로 기획하여 취지를 아시는 분들께 소개 하고자 하였습니다. 인검 제작 기록을 읽어보면 특정 사주팔자의 특정 성씨의 양기 가득한 남성이 닭을 죽여 제를 올리며 작업합니다. 하지만 저는 부계 성이 어떤 가치를 보증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없어서 사주팔자를 모르는 동료, 신체 장애를 가진 동료들과 함께 일합니다.

이성을 활용해야 하는 현대의 우리는 옛 기록 상의 기량과 조건을 취사 선택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력 최전정기인 10대에 힘있는 망치질을 도제 식으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백성’입니다. 우리는 ‘국민’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의무교육을 받고 증기, 전기, 유압을 배웁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가업을 물려받아 식칼을 만드는 분들을 보면 기계의 힘을 빌어 망치질을 하며 모양을 보고 강도와 경도를 높입니다. 그것도 철에나 가능한 일이 고, 은은 인성과 연성을 활용하는 소재입니다.

월인공방에서는 은으로 가능한 최대 강도를 검신 형태로 가공하는 작업을 인월 인일 인시로 배정하였습니다. 무른 은으로 살이 베일 정도의 강도를 만들어내는데 10톤의 압력이 필요했습니다. 특수한 지반 공사 위에 설치되어 10톤의 압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대한 기계를 종로 한복판에서 새벽 4시에 가동시킨다는 것은 돈을 준다고 되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월인공방은 과거 기술자들이 기술을 습득하던 유년기에 받은 공교육으로 업무 내용을 미분하고 숙련도와 투입 시간을 적분합니다. 다양한 이들과 교류하며 점으로 흩어져 있던 기술들을 별자리로 연결하는 소통이 실은 주된 업무입니다. 은처럼 무른 금속도 엄청난 고압을 주면 살이 베일만큼 벼릴 수 있기에, 그렇게 만드는 고압 형단조 설비를 가동할 수 있는 시간동안 은괴를 투입할 수 있다면 꽤 많은 수량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공방에서는 은을 살 충분한 예산이 없었습니다. 올해에는 펀샵 덕분에 많은 은을 준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최대 기량을 발휘해 볼 수 있게 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왕이 거느리던 인력보다 더 강력한 마력으로 수천 마리의 말을 달리게 해 보겠습니다. 이상으로 3월 2일 갑인일을 준비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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